
- “상하이 망명, 독립의 길을 걷다 – 김붕준”
- “흥사단부터 임시정부까지, 김붕준의 독립투쟁”
- “조국을 위한 개척자, 김붕준의 삶”
- “조용히 그러나 굳세게, 김붕준 이야기”
- “105인 사건 이후, 그는 독립의 불꽃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김붕준(金朋濬, 1888~1950)은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내내 대한 독립을 위해 굳건히 싸운 열혈 애국자였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군석(君錫), 호는 당헌(棠軒)이며, 다른 이름으로 김기원(金起元)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제 문서에는 ‘김명준(金明濬)’으로도 표기되었으나, 이는 오기로 알려져 있다.
초기 생애와 계몽운동
그는 1895년부터 1902년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고, 1908년 서울로 올라가 보성중학교 농림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서북학회와 청년학우회에 참여하며 계몽운동에 본격 뛰어들었고, 신민회의 청년 조직에서도 활약했다.
망명과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1운동 이후 그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군무부 서기, 임시의정원 의원, 비서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실무를 맡았다. 같은 해 대한적십자회 창립을 주도했고, 선언문과 결의문 발표에도 참여했다.
1920년에는 군무부 참사로 선임되었고, 군사 교육을 위해 육군무관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교통부 참사로도 임명되어 국내 특파원들을 관리했다. 중국에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김기원’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교민단과 흥사단 활동
상하이 교민사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그는 1923년 교민단 총무로 선임되어, 같은 해 관동대지진으로 희생된 조선인을 추도하는 행사를 주관했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논의하는 연설회도 개최하였다.
흥사단에도 깊이 관여한 그는 1921년 원동임시위원부에 가입, 청년 지도와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하였다. 중한 간 친선을 위한 중한호조사 설립, 중국 유력 인사들과의 교류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교육자로서의 면모
그는 1924년 상하이 법정대학을 졸업하며 교육자로서도 명성을 쌓았다. 법과 행정에 대한 이해는 이후 그의 정치 활동과 임시정부 내 역할에 큰 도움이 되었다.
김붕준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을 다진 실무자이자, 교육자, 조직가로서 조국 독립을 위한 모든 분야에서 헌신한 인물이었다. 1989년, 그의 공로를 기리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오늘날에도 진정한 애국의 상징으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