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김완규 선생은,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독립유공자입니다. 그의 삶을 따라가며, 조국을 위한 치열한 발자취를 되짚어봅니다.
초년기: 양반가에서 태어나다
김완규 선생은 1876년 7월 9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병유와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의 외아들로,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상헌의 10대손입니다. 조부 김우근 역시 돈녕부 도정에 오른 집안이었습니다.
출생 연도에 대한 기록은 다소 엇갈리지만, 그의 양반 출신 배경은 일관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년 시절 그는 여수 통신주사, 한성부 주사 등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천도교 입교와 민족운동

1908년 김완규는 대한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일제의 한일병합 직후 천도교에 입문했습니다. 손병희와의 친분을 계기로 천도교에 입교한 것으로 보이며,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의 발행인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곧 석방되어 천도교의 봉도, 법암장 등 요직을 맡았습니다.
3.1 운동: 민족대표로서
1919년 3.1 운동이 계획될 때, 김완규는 서울에 올라와 권동진 등으로부터 거사 계획을 듣고 적극 찬동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도 참석했습니다. 곧바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단호한 의지를 밝혔습니다.
"될 수 있는 데까지는 하여 볼 생각이다."
"나는 일본 국민이 되지 않을 것을 명심하고 있다."
결국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해방 이후와 독립촉성운동
1921년 출옥 후 김완규는 농업에 종사하며 조용히 지냈지만, 해방 이후 다시 활발히 움직였습니다.
1945년 민생협회 회장을 맡고, 1946년 3.1 운동 기념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같은 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성지부장, 이어 고문으로 선출되며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48년 단독선거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도, 김완규는 원칙을 지키며 신중하게 행동했습니다. 김구, 김규식 등이 발표한 단독선거 반대 성명서에는 동의했지만 끝내 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지막 길과 영면
1949년 6월 21일, 서울 종로구 명륜4가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장례는 천도교당 대광장에서 애국단체 연합장으로 치러졌으며, 많은 독립운동 동지들이 참석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다가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이름, 김완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단 한 번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던 김완규 선생.
우리는 그의 조용하지만 단단했던 걸음을 기억하고,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