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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민족과 신앙의 길을 걷다 – 독립운동가 길선주 이야기

by info5609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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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신앙의 길을 걷다 – 독립운동가 길선주 이야기

 

  • "기도가 민족을 살렸다" – 길선주의 삶
  • "평양 대부흥, 그 중심엔 그가 있었다"
  • "3·1운동 민족대표, 목사가 되다"
  • "성경 들고 만세 외친 독립운동가"
  • "신앙으로 일제에 맞선 남자"
  • "설교하던 그가 감옥으로 간 이유"

 

 

1907년 평양의 부흥을 이끈 인물, 조선 최초의 장로 목사 중 한 명, 그리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 이 모든 타이틀은 한 인물에게로 모입니다. 바로 길선주(吉善宙). 오늘은 '기도의 사람'이자 '민족의 사람'이었던 그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 유년기와 신비한 수련의 시기

길선주는 1869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한문 교육을 받으며 총명함을 보였고, 젊은 시절에는 관성교와 선도 수련에 심취해 신체 능력을 단련하기도 했습니다. 신비주의적 종교 체험을 하던 그는 후에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 신앙과 함께한 삶

1896년 평양의 판동교회에 출석하며 기독교인이 된 그는, 이후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첫 졸업생으로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바로 그 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전국으로 번졌고, 그 중심에는 길선주의 회개와 기도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서적인 『해타론』, 『만사성취』 등을 집필하며 말씀을 전했고,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는 ‘설교자 길선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민족대표가 되기까지

그는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을 따르며 정치적 활동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맏아들 길진형이 '105인 사건'에 연루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후 정교분리의 틀을 넘어서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됩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른 대표들이 체포된 상황. 그는 도망치기보다는 스스로 자수하며 책임을 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결국 무죄로 석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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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과 유산

이후 그는 종말론과 묵시록에 몰두하며 신비적 신앙운동을 이어갔고, 사회주의 청년들과의 마찰로 장대현교회에서 나와 신현교회를 세우기도 합니다. 1935년, 평서노회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쓰러져 같은 해 11월 26일 별세했습니다.

그의 장례는 장로교회장으로 치러졌으며, 평양 서장대 교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신앙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삶

길선주는 단지 목사나 설교자 그 이상이었습니다. 신앙이 민족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준 인물. 그의 기도와 외침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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