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권총의 의열투사, 김상옥 의사 이야기

"총알 11발도 꺾지 못한 불굴의 의지"
1923년 1월, 서울 종로는 그야말로 전장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혼자서 수백 명의 일본군과 경찰에 맞서 무려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장렬히 순국했죠. 이 인물이 바로 김상옥 의사입니다.
그의 삶은 단순한 무장 투쟁의 기록을 넘어, 진정한 독립정신과 민중의 저항의지를 보여준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1. 불우한 유년기, 독립운동가의 씨앗이 되다
1889년 한성부(현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옥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힘겨운 삶 속에서 철공장에서 일하며 한학과 신학문을 병행했습니다. 열네 살부터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는 삶을 살았고, 이후 개신교 신앙을 통해 보다 넓은 세계를 접하게 됩니다.
1910년대에는 동대문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운영하며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그의 성공은 단순한 자본 축적이 아닌 민족운동의 자금줄이자 거점이 되었죠.
2. 말총모자와 독립자금
1910년대 중반, 그는 ‘말총모자’를 창안하여 국산품 장려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수익금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고, 그가 운영하던 철공소는 무기 제조 및 독립운동 비밀 거점 역할까지 수행했습니다. 당시 그가 거느린 직원만 해도 50여 명, 단순한 상인 이상의 역할을 해낸 인물이었죠.
3. 본격적인 의열투쟁, 그리고 상하이 망명
3.1 운동 이후 김상옥은 무장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합니다.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간했으며, 암살단을 구성해 친일 반역자를 응징하는 활동도 벌였습니다.
1920년 일본의 주요 인사 암살을 시도하다가 거사 실패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류하며 의열단에도 입단하게 됩니다.
4.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그리고 역사에 남은 시가전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은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합니다. 이 사건은 일본 경찰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곧바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죠.
하지만 진짜 전설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1월 22일 새벽, 일본 경찰 400여 명이 김상옥의 은신처를 포위하고 체포에 나서자 그는 쌍권총을 들고 단신으로 맞서 싸웁니다. 무려 3시간 반 동안의 총격전 끝에, 마지막 총알 한 발을 머리에 쏘아 자결.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순국했습니다.
사망 당시 그의 손에는 여전히 권총이 쥐어져 있었고, 눈은 부릅뜬 채였습니다. 일본 경찰조차 그의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결국 어머니를 불러 생사를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5. 김상옥, 역사 속의 영웅으로 남다
김상옥 의사의 시신에서는 총 11발의 총상이 발견되었고, 그중 1발은 자결용. 그가 맞서 싸운 상대는 400여 명. 그는 단지 싸운 것이 아니라, 조선 민중에게 항일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고,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및 독립장을 추서받았습니다.
1992년,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의 최초 선정자가 되었으며,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 “총은 관보다 값지다”
중국 상하이에서 함께 활동하던 여류 독립운동가 장규동이 순국했을 때, 김구 선생이 준 장례비로 그는 관이 아닌 권총을 샀습니다.
“동지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관보다 총이 더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줍니다.
⛩ 마무리하며
김상옥 의사는 이름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는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지만, 그의 투쟁은 단연 돋보입니다. 무장 투쟁이라는 가장 위험한 길을 택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삶 전체를 바쳤고,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그 한 마디는 단순한 외침이 아닌 민족의 절규이자 희망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얼마나 값진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