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성숙, 승려에서 혁명가로!

info5609 2025. 4. 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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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을 위한 길, 운암 김성숙 이야기
  • 승려, 독립운동가, 정치가 — 김성숙의 삶
  • 나라를 위해 깨어있다, 운암 김성숙
  • 잊지 말아야 할 이름, 독립운동가 김성숙

독립운동가, 승려, 정치가 — 운암 김성숙 이야기

 

오늘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그리고 불교 승려였던 운암 김성숙(雲巖 金星淑) 선생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그의 법명은 '태허(太虛)', 호는 '운암(雲巖)'입니다. 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았던 한 인물의 삶, 함께 살펴보시죠.

 


어린 시절, 독립운동의 싹을 틔우다

김성숙 선생은 1898년 3월 10일,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며 민족정신을 키웠고, 대한독립학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일찍부터 나라 사랑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1916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 과정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승려로서의 길,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독립을 향해

 

만주로 향하는 도중, 김성숙은 경기도 용문사 풍곡 신원 선사를 만나 출가하게 됩니다.
봉선사에서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는 경전뿐 아니라 근대 과학서적도 탐독하며 세상의 변화를 공부했습니다.

특히, 1919년 3·1운동 때는 봉선사 승려로서 양주 광천시장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체포돼 2년간 복역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서다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1938.10.10 - 독립기념관

 

1923년, 김성숙은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해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고, 조선의열단에 가입해 활약했습니다.

그는 "혁명동맹" 주필을 맡고, 후학 양성에도 힘썼는데, '아리랑'의 실제 모델인 김산(장지락) 또한 그의 제자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에 참여했고,
1938년에는 김원봉 주도로 창설된 조선의용대 정치부 주임으로 활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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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임시정부 요인 귀국사진 1945.12.3-독립기념관

 

 

1942년, 김성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 국무위원외교연구위원을 맡았습니다.
특히 대소련 외교를 담당하며 임정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소 활동이 알려지면서 그는 임정 내에서 이승만을 강하게 비판했고, 주미위원장 해임을 주장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다

1945년 광복 이후, 김성숙은 임정 환국 제2진으로 귀국합니다.
곧바로 독립노동당을 창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서 활동했으며,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웠습니다.

1950년대에는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창당을 모색했으나, 노선 차이로 참여를 거부했고,
1958년에는 제1공화국이 조작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운암 김성숙, 그의 삶이 남긴 의미

동작동 국립묘지 김성숙 묘 - 독립기념관

 

 

1969년 4월 12일, 서울에서 병환으로 별세한 김성숙 선생.
그는 승려였지만 단순히 개인의 깨달음이 아닌,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운 진정한 혁명가였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민족과 민중의 편에 섰던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줍니다.

"진정한 승려는 세상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않는다."
김성숙 선생의 삶이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 다음에는 김성숙 선생과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소개해볼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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