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지조, 독립의 길을 걷다 – 권동진 선생 이야기

3·1운동, 6·10만세운동, 그리고 신간회.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모두 아우르는 독립운동가, 권동진(權東鎭) 선생을 알고 계신가요?
■ 무관의 가문에서 태어난 개화파 청년
1861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권동진 선생은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가문에서 성장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무예와 학문을 익혔고, 1882년 사관학교 1기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였습니다.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의 휘하로 활동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했을 만큼, 그는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이었습니다.
■ 동학에서 천도교로, 신앙과 민족의 길을 함께하다
일본 망명 중 동학에 입교한 그는 손병희와 함께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고 귀국 후 천도교 간부로 활약했습니다. 교우구락부를 만들어 조직을 정비하고, 도집·전제관장·포덕주임 등을 맡아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성장합니다.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태화관에서 만세를 외쳤던 권동진 선생.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릅니다.
■ 인류주의자 권동진, 사회주의도 포용하다
출옥 후 그는 사회주의를 인류주의의 실현방식 중 하나로 받아들였고, 종교·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실질적 개혁의 길을 강조했습니다.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가리지 않고 민족 독립을 위해 연대하는 자세는 그 시대를 앞서간 시각이었습니다.
■ 신간회와 민족통일전선의 실천가
1926년 6·10만세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이듬해에는 신간회 본부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신간회 운동에 누구보다 헌신하며, 통일전선의 가능성을 몸소 실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10만 원이 생긴다면?"이라는 질문에, "신간회 본부 회관을 짓고 운영자금으로 쓰겠다"고 답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진정성은 말해 무엇할까요.
■ 조국의 독립을 끝까지 바란 선비
권동진 선생은 1947년, 해방된 조국을 잠시나마 본 뒤 눈을 감았습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을 추서했습니다.
🔖 마무리하며
권동진 선생은 무관 출신으로 개화와 신앙, 독립운동, 민족연대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친 조선의 지조이자 한국 독립운동의 길잡이였습니다.
그의 삶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