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소원은 오직 하나,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다."
이 한 문장은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일생을 관통합니다. 구한말 혼란의 시대를 살며,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부터 해방 이후의 남북협상까지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인물, 백범 김구.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 유년 시절과 동학 입도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연상, 호는 백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그는, 신분 차별에 분노하며 1893년 동학에 입도합니다. 불과 열일곱의 나이에 **황해도와 평안도 동학군을 이끄는 ‘아기 접주’**로 활동하며, 수백 명의 신도를 거느렸습니다.
⚔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활동
1894년 제2차 동학농민운동 당시, 김구는 해주성 공격을 주도하는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활약합니다. 이후 동학이 진압되고 은신하던 중,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의병 활동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1895년에는 김이언의 의병 부대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 교육 운동과 독립운동의 전개
1906년에는 해서교육총회 총감, 1907년 신민회 황해도 총감 등으로 활동하며 계몽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임명됩니다. 이때부터 김구의 생애는 명실상부한 독립운동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 의열투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920년대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의사의 의거(1932년)**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을 직접 지도합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각인시키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 한국광복군 창설과 임시정부 주석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조직 기반을 마련합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오르며, 독립운동의 최고 책임자로서 활약합니다. 그는 광복 후에도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북협상 참여 등 자주 통일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암살과 민족의 비극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김구.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위해 분투하던 그의 생애는 안타깝게도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언처럼, "통일된 조국에서 살고 싶다"는 꿈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 백범 김구의 유산
김구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습니다. 그의 정신은 『백범일지』라는 자서전을 통해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 맺으며
김구는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염원했던 민족의 스승이었습니다. 조국을 잃은 시대에 온몸을 던졌고, 조국을 되찾은 후에도 국민의 뜻을 따르려 노력한 참된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삶은 곧 대한의 근현대사이고, 자주 독립의 역사입니다.